AI 시대, 회사의 일은 어떻게 다시 나뉠까#
2026-04-12

요즘 회사 안에서 일의 경계가 빠르게 흐려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기획자가 기획을 하고, 디자이너가 화면을 설계하고, 개발자가 코드를 구현하는 식으로 비교적 역할이 또렷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AI 도구와 에이전트 환경이 발전하면서, 한 사람이 여러 영역의 일을 직접 해보는 장면이 점점 더 흔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회사 내부 시스템을 AI가 다룰 수 있게 해주는 하네스 환경이 잘 갖춰지면, 비개발자도 데이터 조회, 화면 수정, 기능 추가 같은 일을 훨씬 빠르게 시도할 수 있습니다. 예전이라면 여러 사람을 거쳐야 했던 일이, 이제는 한 사람이 AI와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상당 부분 해결되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이 변화는 생산성을 높이는 면에서 분명 강력합니다. 다만 동시에 많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기도 합니다. 개발자는 “이제 내 역할은 무엇인가"를 묻게 되고, 디자이너는 “내 일이 단순 다듬기로 줄어드는 것 아닌가"라는 불안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기획자 역시 “어디까지 직접 해도 되는가"라는 새로운 질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필자는 이 변화의 핵심을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직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회사 안에서 역할을 나누는 기준이 바뀌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달라진 것은 시도 비용입니다#
과거의 소규모 조직에서는 선택과 집중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사람도 적고 개발 시간도 오래 걸렸기 때문에, 처음부터 “무엇 하나를 선택해서 거기에 힘을 모을 것인가"가 핵심 전략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꽤 달라졌습니다. AI를 이용하면 작은 기능이나 MVP를 빠르게 만들어 보고, 반응이 없으면 버리고, 다른 방향을 다시 시도하는 일이 훨씬 쉬워졌습니다. 예전보다 만드는 비용뿐 아니라, 시도해 보는 비용 자체가 낮아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초기에 하나만 고르는 방식보다, 여러 가설을 동시에 실험해 보는 전략이 더 합리적일 수 있습니다. 낚싯대를 여러 곳에 던져 두었다가, 실제로 물고기가 무는 자리에 뒤늦게 집중하는 방식에 가깝습니다.
중요한 것은 선택과 집중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선택과 집중이 일어나는 시점이 뒤로 밀렸다는 점입니다.
- 과거에는 만들기 전에 하나를 골라야 했습니다.
- 이제는 여러 개를 빨리 만들어 본 뒤, 신호가 오는 것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이 변화는 조직 운영 방식에도 영향을 줍니다. 초기 단계에서는 더 많은 실험을 허용해야 하고, 동시에 무엇을 계속하고 무엇을 접을지 빠르게 판단하는 능력이 더 중요해집니다.
직군보다 영역별 owner가 중요해집니다#
이 변화가 더 깊어지면, 회사는 예전처럼 직군 중심으로만 움직이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장기적으로는 “기획자 / 디자이너 / 개발자"라는 구분보다, 누가 어떤 영역의 목표와 결과를 책임지는가가 더 중요해질 가능성이 큽니다.
필자가 여기서 말하는 owner는 단순히 직급이 높은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영역을 맡아, 아래와 같은 기준과 판단을 책임지는 사람에 가깝습니다.
- 무엇을 목표로 할지
- 어떤 제약 안에서 움직일지
- 어디까지 자동화해도 되는지
- 무엇을 성공으로 볼지
- 문제가 생기면 누가 최종적으로 판단할지
즉 모든 사람이 아무 시스템이나 건드리는 구조가 되는 것이 아니라, 경계가 명확한 영역별 오너십이 생기는 쪽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보면 장기적으로 인간과 AI의 역할도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 인간은 목표, 우선순위, 제약, 책임을 정의하는 쪽으로 이동합니다.
- AI는 실제 작업을 수행하는 쪽으로 이동합니다.
조금 과감하게 표현하면, 인간은 점점 의사결정자에 가까워지고 AI는 점점 작업자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구조가 건강하게 작동하려면, 오너의 책임과 권한이 어디까지인지가 매우 선명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개발자와 디자이너는 무엇을 하게 될까요#
이 질문이 가장 예민합니다. 실제로 많은 회사에서 비개발자가 AI를 이용해 디자인 초안이나 기능 구현을 빠르게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하네스 환경이 충분히 좋아지면, 초안 수준이 아니라 서비스에 거의 바로 반영 가능한 결과물도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편하지만 인정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앞으로는 예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많은 수의 개발자와 디자이너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반복적인 화면 구현, 익숙한 패턴의 기능 추가, 단순 연결 작업의 비중은 줄어들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발자와 디자이너가 곧바로 사라진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다만 역할의 중심은 분명 달라질 수 있습니다.
과도기에는 이런 모습이 자연스럽습니다.
- 기획자나 운영자도 직접 디자인과 개발을 시도합니다.
- 디자이너와 개발자는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의 품질을 책임집니다.
- 동시에 다음 단계에서는 리뷰 자체를 줄이기 위한 기준과 시스템을 설계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리뷰를 단순한 화면 검토나 코드 읽기, 승인 버튼에만 묶어 두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일은 이런 것들입니다.
- 어떤 변경은 자동 반영해도 되는지 정하는 일
- 어떤 변경은 사람의 확인이 반드시 필요한지 정하는 일
- 실패를 빠르게 감지하는 기준을 만드는 일
- 디자인 시스템과 코드 규칙을 표준화하는 일
- AI가 안전하게 일하도록 가드레일을 만드는 일
즉 개발자와 디자이너는 “직접 많이 만드는 사람"에서 “AI가 안전하고, 같은 기준으로 일관되게 만들도록 환경을 설계하는 사람"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큽니다.
가장 위험한 지점은 실험과 운영을 섞는 일입니다#
필자가 특히 중요하게 보는 지점은, 시험해 보는 단계와 실제 서비스를 운영하는 단계를 분명히 구분하는 일입니다.
기획자가 빠르게 기능을 시험해 볼 수 있도록 실험 환경을 열어두는 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 환경에서 나온 결과물을 그대로 운영 코드에 한 번에 넣으려 하면 문제가 커집니다. 특히 사용자가 직접 마주하는 화면 영역처럼 여러 요소가 촘촘히 연결된 곳에서는, 변경이 너무 많아지면 사람도 AI도 리뷰하기 어려워집니다.
이때 흔히 세 가지 의견이 나옵니다.
- 일단 반영하고 이슈가 생기면 나중에 대응하자
- 변경사항을 쪼개서 부분적으로 리뷰하고 병합하자
- 다시 구현하되 작은 단위로 병합 요청을 만들자
필자의 생각은 비교적 분명합니다. “일단 반영하고 나중에 대응하자"는 기본 원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 방식은 속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검토 비용과 장애 비용을 운영 환경 뒤로 미루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에 너무 많은 변경이 들어가면, 문제가 생겼을 때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파악하기도 훨씬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원칙은 이렇게 잡는 편이 좋습니다.
- 쪼갤 수 있으면 쪼개서 리뷰하고 병합합니다.
- 쪼개는 비용이 너무 크면, 차라리 처음부터 작은 단위로 다시 구현합니다.
- 실험 결과는 “바로 반영할 코드"가 아니라 “검증된 아이디어의 원천"으로 봅니다.
AI 시대에는 구현 자체보다, 한 번에 검토하기 어려운 결과물을 정리하는 비용이 더 비싸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험은 자유롭게 하되, 운영 반영은 더 작고 명확한 단위로 관리해야 합니다.
회사는 어떤 체계를 새로 만들어야 할까요#
이 변화 속에서 회사가 가장 위험한 착각에 빠질 수 있는 지점은 이것입니다. “이제 누구나 만들 수 있으니, 굳이 예전처럼 역할 구분이 필요 없겠다"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반대입니다. 생산 권한은 넓어질 수 있지만, 책임과 검증 체계는 더 정교해야 합니다.
회사가 최소한 정리해야 할 것은 아래와 같습니다.
- 어떤 사람이 어떤 영역의
owner인지 - 어떤 작업까지는 자동 반영이 가능한지
- 어떤 변경은 반드시 사람이 승인해야 하는지
- 실패했을 때 누가 롤백을 결정하는지
- 무엇을 성과로 평가할 것인지
평가 방식도 달라져야 합니다. 예전에는 누가 더 많이 만들었는지가 중요했다면, 앞으로는 아래 항목이 더 중요해질 수 있습니다.
- 더 좋은 결정을 내렸는가
- 더 많은 실험을 낮은 비용으로 돌렸는가
- 더 안전한 자동화 체계를 만들었는가
- 조직 전체의 속도를 높이면서도 품질을 지켰는가
즉 앞으로 회사는 생산 행위 그 자체보다, 생산을 안전하게 확장하는 체계를 더 높게 평가해야 합니다.
결국 사람의 일은 사라지기보다 위로 올라갑니다#
필자는 장기적으로 인간과 AI의 관계가 꽤 단순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점점 “무엇을 할 것인가 /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 무엇을 계속할 것인가"를 정하는 쪽으로 올라가고, AI는 점점 실제 작업을 처리하는 쪽으로 내려갈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일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추상적이고 더 본질적인 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무엇을 만들 것인가를 정하는 일
- 어떤 실험을 계속할지 결정하는 일
- 어느 영역에 책임을 둘지 정하는 일
- 자동화의 한계를 정하는 일
- 조직이 감당할 수 있는 리스크를 판단하는 일
이렇게 보면 개발자, 디자이너, 기획자 모두의 역할은 없어지기보다 재편됩니다. 직접 손으로 생산하는 비중은 줄어들 수 있지만, 그 대신 목표를 정의하고 기준을 만들고 책임을 나누는 일이 더 중요해집니다.
마치며#
필자는 이 변화를 단순히 “AI가 사람의 일을 빼앗는다"라고만 보지는 않습니다. 더 정확히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의 위치가 위로 올라가고 있다고 봅니다.
과거에는 누가 직접 만들 수 있는지가 중요했다면, 이제는 누가 더 좋은 질문을 던지고, 더 좋은 기준을 만들고, 더 나은 책임 구조를 설계하는지가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의 조직은 직군별 분업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대신 각 사람이 경계가 분명한 영역의 owner가 되고, AI를 활용해 그 영역의 결과를 만들어 내는 구조로 재편될 여지가 큽니다.
이 흐름 속에서 회사가 해야 할 일도 분명합니다. 더 많은 실험을 허용하되, 더 작은 단위로 운영에 반영하고, 더 명확한 책임 체계를 설계해야 합니다.
결국 핵심 질문은 이 한 문장으로 정리됩니다.
AI 시대에 누가 더 많이 만들 수 있는가.
그 질문도 여전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더 중요한 질문은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AI 시대에, 누가 무엇의 결과를 책임지는가